멸종은 생물학적으로는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를 의미하지만, 그 단어가 내포한 감정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뉴칼레도니아뜸부기(Gallirallus lafresnayanus)는 단 하나의 박제 표본만이 존재하는 조류로, 그 이후로 살아 있는 모습은 단 한 번도 관찰된 적이 없다. 누구도 그 새를 다시 보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도 뉴칼레도니아뜸부기를 기다리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이 새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왜일까? 그것은 생명이 지나간 자리조차 지워지는 것을 인간의 기록 본능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미 멸종된 것으로 간주되는 뉴칼레도니아뜸부기를 여전히 기록하려는 과학자, 탐사자, 작가들의 시도와 그 의미를 조명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야기를 남긴다.

기억조차 흐릿한 조류, 뉴칼레도니아뜸부기의 실체
뉴칼레도니아뜸부기에 대한 정보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탐험가가 수집한 단 한 점의 박제 표본이 전부이며, 그 이후 이 조류는 야생에서 다시는 목격되지 않았다. 학명은 존재하고, 분류학상으로도 조류 목록에 올라 있지만, 실제 생물로서의 실체는 대부분 가정에 의존한다. 이 새가 어떤 울음소리를 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언제 번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학계는 이 조류를 멸종된 종으로 분류하며, 멸종 생물 도감 속에 그 이름을 남겨놓고 있다. 한 종이 이렇게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면서도, 여전히 기록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인간이 ‘존재했던 것’을 지우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이다. 과학은 증거가 사라져도 이름을 남긴다. 이는 그 생명이 과거에 분명히 지구 위를 걸었음을 인정하려는 최소한의 태도이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예의다.
기록하는 사람들: 생명 흔적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과학자들은 때로 ‘불가능한 탐사’를 수행한다. 뉴칼레도니아뜸부기처럼 실존했는지도 의심받는 멸종 조류를 찾기 위해 밀림을 헤매는 일은 과학의 효율성 기준으로는 비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 생물학자, 조류학자,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자, 생명에 애정을 가진 시민과학자들은 이 새의 흔적을 추적하며, 희망보다 책임감을 안고 현장을 누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다. 생명이 완전히 잊히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를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기억의 연결’을 만들려는 행위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데이터 수집을 넘어선다. 침묵 속에서 사라진 존재조차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생물학적 윤리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가: 멸종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현대 사회에서 멸종은 뉴스의 화젯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일이 많다. 뉴칼레도니아뜸부기처럼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조류의 존재는 대중에게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 환경 보호 단체조차도 눈에 보이는 위협과 당장 손쓸 수 있는 종에 우선순위를 둔다. 실체가 없고, 복원 가능성이 희박한 존재는 점차 기록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은, 존재에 대한 사회적 책임조차 부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생물 다양성의 붕괴는 단일 종의 사라짐을 넘어선 문제다. 하나의 조류가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것이 사라짐으로써 생긴 빈자리는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뉴칼레도니아뜸부기의 침묵은 그래서 가볍지 않다. 우리는 지금도 너무 많은 생명을 기록하지 않은 채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 무관심이 더 큰 침묵을 만들고 있다.
기록은 복원의 첫걸음이다
사라진 생명을 다시 복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많은 과학자들은 고개를 저을지 모른다. 뉴칼레도니아뜸부기는 DNA 추출도 어렵고, 개체 수의 기록도 없어 복원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류에 대한 기록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다. 지역 생태조사 보고서, 시민 과학자들의 탐색 일지, 학술 논문,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촬영기록 등이 그 예다. 기록은 기억을 확장시키고, 잊혀질 뻔한 존재를 다시 호출한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다. 기록이 없다면, 복원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단 한 줄의 기록이 언젠가 실제 발견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기록하는 일은 그래서 복원의 첫걸음이자, 멸종 이후에도 생명을 존중하는 인간만의 방식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생명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뉴칼레도니아뜸부기는 이제 이름만 남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생명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새를 기록하는 일은 무의미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생명을 향한 가장 순수한 존중일 수 있다. 과학은 확실성을 추구하지만, 생명은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 존재해왔다. 잊히는 존재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우리는 수많은 생명을 잃고 있고, 또 잊고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사라진 존재를 기록하며 말한다. “당신은 여기에 있었고,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뉴칼레도니아뜸부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기록 속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